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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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西 三層石塔)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1. 6. 21:15
보물,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西 三層石塔) 성주사지 금당지(金堂址) 뒤에 3기의 석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이중 기단(二重 基壇) 위에 만들어진 삼층석탑으로 면석(面石)과 탑신석(塔身石)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撐柱)가, 지붕돌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새겨져 있는 등, 통일신라 말기(9세기)의 전형적인 삼층석탑 양식을 띠고 있다. 화강암으로 되었으며, 높이는 443cm이다. 이탑은 지붕돌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는 불교 행사 때 금동판이나 기타 장식품 등을 매달아 탑의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현재 상륜부가 없어졌다. 이 탑은 승탑(浮屠, 부도)으로 추정되었으나 성주사 사적기(聖住寺 事蹟記)에 적힌 바에 따르면 정광(定光)·가섭(迦葉)·약사여래(藥師如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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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東 三層石塔)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1. 5. 21:18
보물,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東 三層石塔)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은 금당(金堂) 터 뒤에 3기의 석탑 중 동쪽에 있는 탑이다. 이 탑은 승탑(浮屠, 부도)으로 추정되었으나 성주사사적기(聖住寺事蹟記)에 적힌 바에 따르면 정광(定光)·가섭(迦葉)·약사여래(藥師如來) 사리탑(舍利塔) 중의 하나로 추정된다. 석탑은 중앙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양 옆에 동 삼층서탑과 서 삼층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국내에는 이와 같은 가람배치는 이례적인 것인데 발굴조사 결과, 금당 앞에 오층석탑을 세워 1 탑 1 금당 형식의 가람배치를 조성한 후 뒤에 석탑 3개를 다른 곳에서 옮겨와 추가로 배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탑은 2중 기단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면석(面石)과 몸돌(碑身)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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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五層石塔)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1. 4. 20:06
보물,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五層石塔) 화강암으로 된 이 석탑은 성주사의 불탑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2중 기단(二重 基壇) 위에 세운 5층 석탑으로 전체 높이는 634cm이다. 기단부와 옥개석(屋蓋石), 탑신석(塔身石)이 완만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져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경쾌한 모습을 이루고 있다. 1층 몸돌에 사리공(舍利空)이 있으며 기단부와 1층 몸돌 사이에 굄돌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의 전형적 석탑 양식은 2중 기단 위에 3층 석탑을 세우는 것인데, 이 석탑은 2중 기단 위에 5층 석탑이 올려져 있다. 이는 이곳이 옛 백제(百濟)의 영역이었으므로 백제탑과 신라탑의 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보거나, 이 시기에 나타난 다양한 탑 양식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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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中央 三層石塔)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1. 3. 21:13
보물,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中央 三層石塔) 성주사지 금당지 뒤의 3기의 석탑 중 가운데에 있는 탑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국가를 상징하려고 초기에는 튼튼하고 높은 2중 기단(二重 基壇)을 가진 거대한 3층 석탑을 만들었는데,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3층 석탑의 규모가 작아진다. 이 석탑은 규모만 축소되었을 뿐 형식은 2중 기단 위에 3층 석탑을 세우는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재료는 반려암(斑糲岩)이며, 높이가 410cm이고, 상륜부(相輪部)가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으며 날카로운 윤곽의 지붕돌이 특징이다. 이 탑은 승탑(浮屠, 부도)으로 추정되었으나 성주사사적기(聖住寺事蹟記)에 적힌 바에 따르면 정광(定光)·가섭(迦葉)·약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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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강화 초지진(史蹟, 江華 草芝鎭)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2. 19. 22:15
초지진 소나무 - 보호수 포탄 흔적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및 운양호 사건(1875년)의 격전장으로 노송과 성벽에 각종 포탄의 흔적이 남아있어 그때의 치열했던 전황을 말해주고 있다. 대포(大砲) - 초지진 홍이포(草芝鎭 紅夷砲) 구경 : 100mm, 길이 : 215cm, 중량 : 1,800kg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 장전식화포(砲口 裝塡式火砲)로 사정거리는 700m이며, 조선 영조 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강화 초지대교(江華 草芝大橋) 제2강화대교라고 불리는 강화 초지대교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대명리를 잇는 8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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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덕포진 파수청지(史蹟, 德浦鎭 把守廳址)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2. 17. 22:10
사적, 덕포진 파수청지(史蹟, 德浦鎭 把守廳址) 이 유적지는 1980년 덕포진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건물터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추정되며 맞담을 쌓듯이 둘러친 석벽이 있었다. 발굴 당시 7개의 포탄과 조선시대의 화폐인 상평통보(常平通寶) 2개가 출토되었으며, 건물터 안에는 주춧돌과 화덕이 발견되었다. 이 건물은 포대(砲臺)와 돈대(墩臺)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포를 쓸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는 장소인 동시에 포병을 지휘하던 장대(將臺)로 생각된다.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 106 파수청 발견(把守廳 發見) 역사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관방 시설인 덕포진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은 김기송(김포시 문화관광해설사) 선생의 의지와 사명감에서였다. 그는 손돌공의 진혼제를 지내던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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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죽주산성과 송문주 장군 사당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2. 15. 21:18
忠義祠(충의사) 송문주가 몽골군과 대치하던 당시 성을 포위한 몽골군이 죽주산성 안에는 물이 별로 없으니 곧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안 송문주가 커다란 붕어를 잡아서 몽골군 진영에 보내 "멀리서 오셨는데 배가 고프실 것 같아서 물고기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성에 물이 많음을 알렸고 이에 포위를 풀고 물러나는 몽골군의 배후를 쳐서 크게 이겼다는 전승과 함께 채제공이 살던 당시까지도 죽산 사람들은 송문주를 가리켜 "송 장군이 아니었다면 우리 조상들께서는 어륙(魚肉)이 되었을 것이고, 조상 없이 우리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죽산 사람들이 이렇게 밭 갈고 우물 파서 부모 처자 데리고 살아가는 것은 모두 장군의 은혜다"라며 송문주를 칭송하였다고 한다. 경기도 기념물, 안성 죽주산성(安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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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충청남도 기념물 -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2. 6. 21:11
사적, 충청남도 기념물 -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天安 柳寬順 烈士 遺蹟)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은 유 열사가 태어나 자란 집과 아우내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린 봉화터이다. 현재 이곳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에 태어났으며,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1919년 4월 1일 3천여 명이 참여한 충청지방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인 아우내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일제의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지만 그 안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폭행과 고문을 받았고, 결국 193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아우내 3.1운동 사적지에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추모각과 구미산 아우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