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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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충청남도 기념물 -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2. 6. 21:11
사적, 충청남도 기념물 -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天安 柳寬順 烈士 遺蹟)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은 유 열사가 태어나 자란 집과 아우내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린 봉화터이다. 현재 이곳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에 태어났으며,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1919년 4월 1일 3천여 명이 참여한 충청지방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인 아우내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일제의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지만 그 안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폭행과 고문을 받았고, 결국 193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아우내 3.1운동 사적지에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추모각과 구미산 아우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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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 수원 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수원사랑/화성행궁(華城行宮) 2021. 12. 1. 19:19
사적, 수원 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외 신풍루(新豊樓) * 1790년(정조 14) 창건 * 2002년 복원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수원읍의 관청 건물을 세우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다가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다. 신풍루는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인 풍패(豐沛)에서 따온 이름으로 제왕의 고향 풍패지향(豐沛之鄕)으로서 화성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건물은 2층의 누각 구조로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고, 위층에는 큰 북을 두어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문루 좌우에는 행랑을 두었고, 양쪽 끝에는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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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史蹟) - 연천 경순왕릉(漣川 敬順王陵)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1. 11. 26. 20:07
신라 경순왕릉 재실 신도비 비각 신도비(神道碑) 이 신도비는 발견되기 전까지 고랑포 주민들이 빨래판이나 징검다리로 이용되는 등 방치되고 있었다. 1976년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발견한 후 1986년에 재실과 신도비 비각을 건립하여 관리하고 있다. 신도비는 마모가 심해서 글씨가 잘 보이지 않고 10자 정도만 알 수 있다고 한다. 신도비 비각에 쓴 메모지 추정 신도비 신도비란 돌아가신 분의 업적이나 사적을 기리는 비석으로 묘로(墓路) 입구나 왕릉 앞에 세워둠 ※ 비면에서 찾아보기 사람 얼굴 형상, 한자(漢字) 10자 정도 – 마음이 고우면 잘 보인다고 함. 풍수로 본 왕릉은 팔백연화격(八百蓮花格),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우리나라 제일의 명당이다. 이곳은 상서(祥瑞) 로운 기운이 많은 곳으로 수험생을 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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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史蹟) 호로고루(瓠蘆古壘)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1. 25. 20:10
연천 호로고루 동벽 호로고루 동벽은 평지로 이어져 적의 침입이 쉬운 성의 동쪽 부분을 방어하는 성벽이다. 성벽은 높이가 10m이고 아랫부분의 폭이 40m, 길이가 90m에 달할 정도여서 마을 주민들이 성이 아니고 재미산이라고 부를 정도로 웅장하다. 동벽을 만드는데 들어간 흙과 물의 양이 대략 15,996㎥에 달한다고 하니 엄청난 토목 공사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호로고루 동벽은 고구려에 의해 처음 만들어져 사용되었지만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이어 벌어진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자 신라가 점령하여 사용하였다. 신라군이 점령할 당시 호로고루 동벽은 오랜 전쟁으로 말미암아 성벽 곳곳이 무너져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신라군은 고구려 성벽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성벽을 덧붙여 쌓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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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史蹟) 연천 당포성(漣川 堂浦城)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1. 22. 19:05
당포성 동벽(堂浦城 東壁) 당포성 동벽은 성내로 진입이 가능한 동쪽 방면을 차단하는 방어시설이다. 성의 규모는 높이 6m, 폭 31m, 길이 50m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돌을 쌓아 만든 성벽으로 보이지만 석성을 쌓기 전에 먼저 점토를 다져 쌓은 후 그 외면에 석성을 쌓아 올린 토심 석축의 구조이다. 중심 성벽이 받게 되는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3단의 보축 성벽을 쌓았으며 성벽 앞에는 폭 6m, 깊이 3m의 구덩이(潢, 황)를 파서 적이 쉽게 성벽을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동벽 외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조성된 수직의 기둥홈(柱洞)이 관찰되는데, 중국 집안의 환도산성, 패왕조산성, 흑구산성, 평양의 대성산성 등 고구려의 산성들에서 확인된 바 있는 특징적인 것이다. 특히 당포성 동벽에서는 수직의 기둥홈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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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史蹟) 연천 숭의전(漣川 崇義殿)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1. 21. 20:12
하마비(下馬碑) 이 비 앞으로 지나갈 때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의미의 표석으로서 주로 궁궐, 향교 또는 유명한 성인들의 사당 앞에 세워 경의를 표하였다. 이 하마비는 최근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홍살문(紅살門) 홍살문은 능(陵) · 원(園) · 묘(廟) · 궁전(宮殿) · 관아(官衙) · 향교(鄕校) · 사당(祠堂) 등의 정면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문이다. 홍살문은 ‘붉은 화살 문’이라는 뜻으로 홍전문(紅箭門),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 홍살문이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해서 세워지게 되었는지는, 문헌상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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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문(長安門) - 수원 화성수원사랑/수원화성(水原華城) 2021. 11. 16. 21:11
장안문(長安門) - 수원 화성 장안문은 수원 화성의 북쪽문이다. 정조는 장안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는 현륭원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라고 풀이했다. 문 밖의 항아리 모양의 옹성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장안문은 남쪽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 네 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 형태다. 길고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 시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 문루 처마 밑에는 다포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 목재를 짜 맞췄는데,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백 년 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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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솔뫼마을 김대건 신부 유적 – 사적 제529호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21. 10. 21. 19:14
솔뫼성지 솔뫼는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라는 뜻으로, 당진군 우강면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 곳에서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태어났는데, 그의 가문은 증조부 김진후, 조부 김한현, 부친 김제준, 그리고 김대건 신부까지 4대가 모두 순교한 집안이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는 면천 군수로 있을 때, 내포의 사도 이존창으로부터 전교를 받은 후 벼슬도 버린 채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로 인하여 솔뫼 마을은 교우촌이 되었고, 그는 홍주, 전주, 공주 등의 감옥에 갇혔다가 1814년 해미에서 76세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1821년 김제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김대건은 7세에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주를 했다. 그리고 1836년 16세 때 신학생으로 뽑혀 최양업(토마스), 최방..